銀魂
긴토키::미래로부터의 전언
자모옹
2015. 10. 20. 14:28
1.
[죄송합니다 긴토키 님. 제가 계산한 것 이상으로 에너지가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강렬한 빛 사이로 울부짖는 아이들의 모습을 본 것이 바로 수 초 전이었다. 제 몸을 찌를듯 비춰지는 빛을 느끼며 눈을 깜빡이고나니, 주변환경이 달라져 있었다. 엔미를 쓰러뜨린 날은 유독 하늘에 짙은 구름이 뒤덮여 있던 날이었다. 밤은 아니지만 밤과 비슷하게 어두웠던 날이었다. 그런 하늘이 그 이후로도 몇 날 며칠 동안 이어졌다. 우스갯소리로, 죽은 동료들을 하늘이 추모하고 있는 거라며 사카모토가 낭만적인 소리를 하기도 했었다.
지금 긴토키와 시간도둑이 서 있는 곳은 그런 어두운 하늘마저 빼곡하게 늘어선 나무로 인해 가려져 있었다. 긴토키는 주변을 둘러보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직도 눈 앞에 어른 거리는 아이들의 우는 모습에, 거듭 되새기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던 긴장이 탁 풀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날아온 시간대가 어떻게 되는데?"
[에너지 부족으로 인해, 원래 예정했던 시간보다 더 뒤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엔미를 해치우고 사나흘이 지난 것 같습니다.]
긴토키는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갔다. 엔미를 해치운 후 모여, 재정비를 갖춘 후 잔당을 해치우기 위해 다시 전장으로 뛰어들었었다. 분명 그 날은 승리한 날이었다. 비록, 당시에 나노머신인 줄 몰랐던 '고독'이란 희한한 공격을 사용하던 엔미의 부하들에의해 피해가 많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 생각보다 많이 늦어지진 않았네."
긴토키는 긴장을 놓지 않고 조심스럽게 풀숲을 헤치며 길을 나아갔다. 명확하게 기억은 안나지만 눈에 익은 장소인 탓이었다.
"엔미의 새로운 코어를 담게 된 이 시절의 나를 죽이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문제 될 거 없어 좋군. 깔끔해. 그런 소감같지 않은 소감을 남기며 긴토키는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긴토키의 뒤를 따르며 시간도둑은 안타까웠다. 그는 저 자신을, 제 손으로 죽이는 것에 일말의 망설임도 흔들림도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님에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었다. 본인이 아는지는 모르지만.
긴토키는 제법 숲의 가장자리로 나오자 몸을 돌려 시간도둑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곧 낯선 웃음이 걸렸다.
"자, 너하곤 여기서 안녕이다. 시간도둑."
예? 당황한 것은 기계 쪽이었다. 긴토키는 당찬 미소를 걸고 저 멀리 어딘가를 응시했다.
"여기, 기억나. 저 끝에 아마 당시 양이지사들의 진지가 있을 거야. 엔미와 싸운 이후 피해가 꽤 커서 당분간 정비를 갖추느라 출전도 안했거든. 그러니까, 저 쪽 너머에, 목표물이 있다 이거지."
[하지만...]
시간도둑은 어쩔 줄 몰라했다. 긴토키는 그런 반응이 꽤 우스웠다.
[그렇다면 경비가 더욱 삼엄하지 않겠습니까. 긴토키 님 홀로 대항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닙니다. 무모한 생각입니다.]
"잠깐. 목표물이 누군지 잊었어? 내 손바닥 안이라고."
무모하지 않아. 나 혼자 있을 때를 노릴테니까. 긴토키가 의지를 표명하기 위해서인지 동야호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시간도둑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그는 이럴 때만큼은 정말 영리했다.
"그러니까 넌 이대로 몸을 피해. 그 요상한 꼴을 보이면 분명 천인이라고 오해를 살 테니까. 이 반대 방향으로 쭉 가다보면 마을이 나올 거야. 일단 거기에 내려가서......"
문득 말문이 막혔다. 긴토키는 잠시 무언가를 떠올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긴토키 님? 시간도둑이 걱정이 묻어나오는 소리로 그를 불렀다. 기계주제에 제가 잘 아는 어느 기계처럼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긴토키는 키나가시 안으로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시간도둑은 그의 손이 쥐고 있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 세 명의 유대를 이어주던, 남겨진 미래의 아이들이 마치 유품처럼 들고 다니던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자신으로 인해 미래로 날아온 긴토키가 지니고 있던, 원래 그의 세계에 있는 아이들과 이어주는 물건이기도 했던 것.
"이거. 너한테 맡길게."
[긴토키 님. 어째서...]
"내가 가지고 있고 싶긴 한데."
어색한 웃음과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나랑 같이 사라지면, 좀 섭섭할 것 같아서 말이다. 나보단 네가 가지고 있는 편이 안전하겠지.
"괜찮다면, 그 녀석들한테 전해줄 수 있을까? 너희들과 함께여서 즐거웠다고, 말이야."
그가 짓는 웃음에 무엇이 담겨있는지는 굳이 그의 상황을 몰라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도둑은 긴토키가 건네는 필름을 천천히 잡았다. 세 사람의 유대의 증표, 그리고 사카타 긴토키라는 인물의, 마지막 유품이자 그의 마음을 담은 것이 제 손 안에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시간도둑을 보며 긴토키는 얼굴에서 힘을 뺐다. 덩달아 너까지 그렇게 축 쳐질 필요는 없는데.
"그보다 넌,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
예상 외의 질문에 시간도둑은 그저 멍하니 긴토키만 바라보았다. 필름을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어두고서 시간도둑은 긴토키의 질문에 대해 어떻게 대답해야할 지 고민했다. 거사를 치를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을 안해둔거야,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야?"
못마땅하게 묻는 긴토키에도 시간도둑은 말이 없었다. 긴토키는 힘빠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뭘 하든 상관 없다만, 조심하라고.
"너한테도 미안하게 됐다. 미래의 나라지만 결국 내 부탁으로 이렇게 험난한 세계에 남겨지게 돼서."
당신은 바보인가. 죽음을, 보다 고차원적인 존재의 소멸을 앞 둔 당신이 할 소리인가. 시간도둑이 반박하기 위해 긴토키에게 한 걸음 다가갔으나 곧 강한 힘에 떠밀려 풀숲으로 나동그라졌다.
긴토키 님...! 벌떡 몸을 일으켜 긴토키를 쳐다보자 그가 긴장한 얼굴로 입술에 검지를 대었다. 그제서야 시간도둑도 인기척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적의 정찰일까. 아니면 양이지사일까.
"네 놈은 누구냐!"
그나마 다행이랄지 양이지사의 순찰 조였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긴토키가 세운 계획은 산산조각이 날 수 밖에 없었다. 예상 밖의 일이었다. 긴토키는 제게 칼을 겨누는 그들에게 빈 손을 들어보이며 얼굴들을 살폈다. 잔뜩 긴장한 순찰과 보초의 얼굴에 무심코 웃을 뻔한 걸 삼키고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 풀숲 너머에서 시간도둑이 잔뜩 긴장한 채 저를 주시하고 있다는게 느껴졌다. 바보같긴. 그렇게 열렬하게 쳐다보면 잘못하다가 들키는 수가 있다고.
"천인과 막부의 앞잡인가...!"
"아니, 아니! 다짜고짜 적 취급이라니! 아니야! 난 따지자면 양이지사 쪽이라고!"
따지자면 말이지. 따지지면. 과거 전적이기도 하고 지금 현재의 저 자신은 실제로 현직에서 뛰고 있으니까 말이다. 순찰 조는 긴장을 풀지 않고 긴토키에게 조금씩 가까이 다가갔다. 난감해하는 긴토키의 얼굴을 확인하고 그에게 무기라고는 커녕 잘 베일 것 같지도 않은 목검만 있는 걸 보고서야 경계를 풀었다. 병사 중 하나가 계속 긴토키의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잠깐들 봐봐. 백야차를 닮지 않았어? 어? 그러고보니 머리색이라던가... 놀란 토끼처럼 눈을 뜨고 긴토키는 그들의 대화를 유심히 들었다. 일단 되는 대로 이 상황을 모면해야했다. 긴토키는 머릿속에 번뜩 뜨인 기지를 바로 써먹었다.
"오, 오오....! 알아보시네! 맞습니다. 제가 그 백야차의 형제입죠! 살아는있나 밥은 잘 먹고 있나, 궁금해하던 차에 이렇게 만나러 왔습니다. 그러니까 칼은 그만 치우고 안내를 해주심이... ."
하지만 그들은 선뜻 긴토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제서야 긴토키는 옛일을 떠올렸다. 소문이 날개를 달고 멀리 멀리 퍼져선, 명성만 듣고 백야차의 가족이라느니 의형제라느니 하는 족속들이 몇 번 찾아오긴 했었다. 전부 한 몫 잡아볼까 하는 속물들과 명성에 목매다는 겁쟁이들 뿐이었다. 몇 번 거하게 시달린 통에 병사들에게도 주의를 일러두었던 기억이 있었다. 나는 형제 같은 거 없으니 그런 말을 지껄이는 놈들은 무시하라고 말이다. 아 하지만 쭉쭉빵빵한 누님이 남매라고 말하면 데려와라. 혹시 모르니까. 나도 모르던 남매가 있을 지도 모르니까. 그런 사족을 붙이기도 했었다.
아악. 어떻게 하지! 속으로는 괴성을 지르며 이쪽 저쪽 뛰어다니면서도 긴토키는 겉으로 평온을 가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그럴 리가. 그 녀석 나 같은 건 형으로 생각 안한다더니, 정말 형제가 없다고 했단 말이에요? 아하하하 그런 천하에 둘 도 없는 망나니를 봤나... 점차 의심의 싹을 틔우는 병사들을 보며 긴토키는 속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애초에 몰래 제 자신을 암살하려던 계획도 날아간 마당에 이대로 사기꾼으로 오해받아 꼼짝없이 잡히거나 쫓겨나면,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아! 이름!!"
갑작스런 긴토키의 고성방가에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 얼굴을 찌푸렸다. 이름? 긴토키가 고개를 붕붕 소리가 나도록 끄덕였다.
"백야차라고 불리는 내 동생, 내 동생 이름을 댈 테니까 동생 앞으로 데려다주쇼. 나 정말 그 녀석 형 맞아요 믿어줘요. 그 철부지 녀석 이름, 사카타 긴토키잖아요."
그래 백야차라는 이명은 제법 유명할 지라도 제 본명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었다. 때문에 본명을 아는 건, 같이 싸우는 병사들 정도였고 그마저도 다른 부대의 병사들은 잘 몰랐다. 이명과 본명이 함께 알려지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며 가츠라가 특별히 신경을 써준 덕택이었다. 바보같은 모습을 떠올리다가도, 5년 후 비뚤어져선, 친 씨였던 제게 마치 대신으로라도 들어달라는 냥 속죄의 말을 읊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입 안이 씁쓸했다. 어쨌든 고맙다 즈라. 이런 곳에서 네 덕을 볼 줄이야. 부디 저 병사들 중 하나라도 제대로 백야차의 이름을 알고 있기를.
다행히도 긴토키의 운이 제법 있었는 모양인지 두 명이나 긴토키의 말이 맞다는 소리를 했다. 맞아. 사카타 긴토키가, 백야차의 본명이지. 그걸 알고 있다니... 진짠가 보군. 어이, 정말이야? 믿어도 되는 거야? 하지만 백야차가 워낙 유명해야지. 아니 본명을 알고 있는건 우리들 정도 뿐일걸. 서로 의견을 조율하는 병사들을, 긴토키는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이 바보들아! 내가 그 본인 맞단 말이야! 논의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다고! 기다리는 그 짧은 와중에 목이 타들어갈 것만 같았다. 긴토키는 몇 번이고 꿀걱 마른 침을 삼켰다. 마침내 결정을 했는지 병사들이 긴토키를 돌아보았다.
"...일단은 믿어주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우리 앞에서 걷도록."
다행이다.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쉰 긴토키는 여즉 저를 경계하는 순찰 조의 앞에 섰다. 일단 여기서 난리를 피우는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이대로 어려움 없이 과거의 제자신을 만나면 그보다 더 좋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리 쉽게 성사되지 않으리란 불안함이 자리했다. 얌전히 진지에 들어갈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야하는 건가. 순찰 조는 혹시 모르니 목검도 잠시 저희가 맡아야겠다고 빼갔다. 제 뒤통수를 띠꺼운 눈으로 잔뜩 노려보고 있을 모습을 그려보니 이 위기를 넘긴 안도감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허전한 허리춤에 갈 곳 없는 손을 흐느적대다가 문득 긴토키는 슬쩍 고개를 돌려 아까 순찰 조를 만난 곳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나오지 마라. 내가 완전히 안보일 때까지 나오지 마라. 풀숲에서 여전히 자기를 주시하고 있을 시간도둑이 눈에 선했다. 이 쪽은 무슨 수를 쓰든 확실하게 목적한 바를 이뤄낼테니, 너는 아무 걱정말고 이 전쟁터를 되도록 빨리 빠져나기를. 어두운 하늘에 풀숲 뒤에 숨어있는 터라 보이지 않았지만 긴토키는 그가 있을 법한 장소를 눈에 담다가, 서두르자는 순찰 조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래. 무사히 살아남아라. 제가 존재했다는 흔적, 그걸 맡긴 자였다. 부디 끝까지 살아남아서, 언젠가 제 대신 아이들을 만날 날이 오지 않을까. 저를 잊어버리고 아예 알지 못하는 아이들일지라도...
괜찮다. 너희가 나를 잊을 지라도 내가 너희를 잊지 않을 거니까. 아이들을, 제 바보같은 인연들을 잊지 않을 거니까.
검문을 마치고 들어선 진지는 상당히 가라앉아 있었다. 하늘은 며칠 째 꾸리고 부상자가 많은 탓이었다. 하다 못해 하늘 만이라도 맑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무겁지는 않았을 거라고 당시에 생각했던 것 같다. 긴토키는 어렴풋한 기억을 되살리기위해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부상 당한 병사들과 피로에 지친 병사들이 지천에 널려있었다. 제 기억이 맡다면 당시 저를 비롯한 가츠라, 타카스기, 사카모토는 작전지휘본부라고 명명한 대불당에 있었다. 부처님 상을 도난당하여 휑 한 대불당 말고도 그보다 작은 크기의 사원이 여러개 딸려있는 제법 큰 사원이 그들이 묵고 있는 곳이었다. 비록 지금은 버려져 폐가 비슷했지만 병시들에게는 그만큼 좋은 은신처이기도 했다.
병사가 걸음을 멈추라고 하더니 무리 중 한 명이 저 앞으로 나아갔다. 그를 따라 움직인 시선의 끝에는 익숙하다면 익숙하고 낯설다면 낯선, 과거 시절의 타카스기가 있었다. 아니 현재 이 시간대에선 귀병대의 총독을 맡아 괴물이라고 불리는 양이지사 타카스기 신스케가 있었다. 긴토키는 눈 앞이 새하얘 지는 것 같았다. 짧게나마 급조했던 계획마저 예상치 못한 타카스기의 등장으로 틀어질 위기에 처했다. 아니 100퍼센트다. 병사에게서 무언가 보고를 받더니 조소를 띠운 타카스기를 보니 100퍼센트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타카스기가 병사와 함께 긴토키 쪽으로 다가왔다. 긴토키는 어찌할 줄 몰라 얼굴이 보이지 않게 몸을 돌렸다. 결국 당도한 타카스기의 인기척이 바로 뒤에서 느껴졌다. 긴토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가 흉흉했다.
"흐음. 긴토키 녀석의 형이라고? 머리는 제법 어떻게 알고 따라했군."
가발인가?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필 두번째 대전부터 거의 대마왕 급이 나타나면 어쩌자는 거냐! 속으로 거의 절규를 내지르며 그런 불만을 터뜨렸으나 바뀌는 건 없었다. 긴토키는 초저함에 달달 다리를 떨었다.
"긴토키의 형이라. 이거참. 가발까지 쓰고 온 그 노력을 봐서라도 녀석한테 보여주고 싶군. 하지만."
정강이에 강한 충격이 느껴짐과 동시에, 어느새 바닥에 무릎을 꿇어버린 긴토키의 목에 차가운 날붙이가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제 목을 날려버릴 것만같은 칼날에 긴토키는 몸을 경직시켰다.
"장난도 정도껏 쳐야지."
이봐. 이 녀석 포박하고 어디 구석에 감금해둬. 주위 병사에게 명령을 내린 타카스기가 몸을 돌렸다. 긴토키는 감금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장난 친 건 미안하지만, 이 쪽도 급하단 말이야. 타카스기."
이름이 불린 타카스기가 멈칫했다. 긴토키는 순순히 포박을 받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타카스기의 눈에 놀라움이 비쳤다. 목소리가...
"그래 천애고아 녀석에게 형제가 어딨냐."
그 말에 불같이 뒤를 돌아보자, 믿을 수 없는 얼굴이 거기 있었다. 타카스기의 잔뜩 놀란 얼굴을 보며 긴토키는 여유롭게 미소지었다.
"그 녀석에게 피가 이어져있는 사람이라고는, 자기자신 밖에 없지."
안 그래? 아무 말도 못하고 굳어있는 타카스기를 보며 긴토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저 녀석의 저런 모습을 본게 어언 십년 만인 듯 싶었다. 저 땐 지지고 볶듯이 서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일방적으로 저 혼자 깐족댔고 그 때문에 타카스기가 열 받아서 같이 맞대응해주는 게 당연한 관계였다. 붙었다 하면 입씨름하는게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했던 관계였다. 그랬던 인연이 왜 그렇게... 아니다. 사실 이유는 누구보다도 정확히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감히 그를 말릴 생각은 못하고, 그저 그가 일으킨 일들의 뒷수습이나 해두는 건지도 몰랐다. 요는 그거였다. 지금의 긴토키로써는 마음 편히 얼굴은 커녕 만나볼 기회조차 없는, 그리운 이를 만난 것에 대한 씁쓸함이 때 아닌 폭설처럼 물 밀듯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건 비단 타카스기 뿐만이 아니었다.
"뭐하고 있나 타카스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익숙한 인영이 다가왔다. 줄줄이 나오는 구만. 긴토키는 작게 침을 삼켜넘기며 바짝 긴장한 신경을 감추고 더욱 느슨한 태도로 섰다. 다가오던 가츠라가 타카스기 앞에 선 인물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 그 모습은 대체... 그리고 곧 그 표정은 험악하게 굳어졌다.
"이보게 즈라! 긴토키가, 자기 당고 좀 사먹고 싶다고 돈 좀 빌려달라는데? 와하ㅏ하하하 정말 태평한 녀석 아닌감?"
호탕한 목소리로 웃어제끼며 사카모토가 다가왔다. 긴토키는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제 옛 지기들을, 지금 시대에선 항상 함께 싸워나가는 동료들을 죽 훑어보았다. 감회가 새로웠다. 이런 생소한 느낌 때문에, 보통 죽기전에 주마등을 보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별로 그립지 않았던, 아득한 과거로만 기억하는 모습들이 눈 앞에 있었다. 막 다가온 사카모토까지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그래. 저 섬뜩한 걸 봤다는 냥 굳어버린 얼굴들만 아니었다면, 긴토키는 좀 더 추억에 젖었을 지도 몰랐다.
"자, 자. 그렇게 귀신이라도 본 것같은 표정은 그만둬. 그보다 눈들이 너무 많은데. 즈라. 이건 안 좋지 않아?"
아주 자연스럽게 이름을 불린 탓에, 호명된 가츠라는 조금 늦게 반응했다. 서둘러 주위를 살피자 근처에서 쉬고 있던 다른 병사들까지 빙 둘러싸서 수근대고 있었다. 어라 백야차 아니야? 그럴 리가? 저 옷은 뭔데? 어디 갔다 온 건가? 말도 안돼. 방금 전 내가 대불당에서 백야차를 보고 온 길인데? 어? 그럼 저 녀석은 대체, 누구야?
가츠라는 퍼뜩 정신을 차리곤 움직였다.
"타카스기!"
"...!"
얼어있던 타카스기를 불러 깨우고 가츠라는 포박하고 있던 병사들을 물리고 긴토키의 밧줄을 자기가 대신 쥐었다.
"...일단 녀석에게 데리고 가자."
"뭐? 즈라. 무슨 생각이야! 그보다 이 녀석은 대체..."
가츠라는 즈라 아니다 가츠라다! 하고 예의 입버릇을 말한 뒤, 사카모토 역시 불렀다. 사카모토 병사들을 해산 시킨뒤 대불당으로 오게. ...알겠네.
가츠라가 앞서 걷고 긴토키가 따라가며 그 뒤를 바짝 신경을 돋운 타카스기가 따라갔다. 점차 빨라지는 발걸음에서 그의 동요가 느껴졌다. 쯧. 긴토키는 혀를 차면서 넘어지지 않게 땅바닥을 예의주시했다.
"...네놈, 대체 정체가 뭐냐. 천인의 기술로 만든 생물병기인가?"
긴토키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부러 감추지 않고 일부러 가츠라에게도 들리도록 성량을 조절했다.
"타카스기 군은 SF를 좋아하나 보죠? 아주 소설을 써라 그래."
"......소름 끼치는군. 목소리까지 똑같아."
가츠라가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지만 표정은 전혀 흥미로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긴토키는 이죽거렸다. 이 당시에도 거의 애어른 같던 가츠라와 타카스기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얼마나 놀랐는지 짐작이 갔다. 하긴 저라도 놀랐으리라. 제 동료를 쏙 빼어닮은 인간이 갑자기 나타나면...
"왜 똑같겠어. 본인이니까 그렇지."
가츠라가 발걸음을 우뚝 멈췄고 그때문에 가츠라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긴토키는 뒤뚱 거리며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본인이라고?"
흔치 않게 동공이 열린 가츠라의 눈을 보며 긴토키는 혀를 찼다. 설마 영화나 소설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를 제가 하게 될 줄이야.
"이렇게 된 거, 너희 도움이나 받자. 지금 이 시대의 내가 있는 곳으로 가는거 맞지?"
"......이 시대의 나?"
"미래를 위해서야.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되어버렸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자기를 사카타 긴토키 본인이라고 밝힌 남자를, 가츠라와 타카스기는 놀란 얼굴로 응시했다. 그가 밝힌 여기 온 이유는 그가 한 말도 안되는 이야기보다도 더 놀라웠다.
"난 미래의, 그러니까 지금 너희로부터 10년쯤 후의 긴토키 씨다. 난 이 시대의 나를 죽이러 왔어."
"헛소리!!"
타카스기가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잡았다. 가츠라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지 말릴 생각은 않고 아무리봐도 똑닮은 사내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멱살이 잡혔는데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배짱. 아니 그보다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내포한 눈동자. 타카스기는 가까이에서 보고야 결국 인정했다. 그는 긴토키와 정말 소름끼치도록 닮았다. 정말 똑같았다. 붉은 눈동자 색까지.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야.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 시절의 나는 죽어야 해."
타카스기는 정말 속이 미식거리는 통에 남자의 멱살을 놔주었다. 현재 자신이 알고 있는 녀석보다 좀 더 커진 키, 짧아진 머리, 그리고 분위기가 달랐다. 원래도 얼이 빠진 놈이었지만 이렇게 까지 여유롭다 못해 무감각한 분위기를 풍기지는 않았었다. 그의 말마따나 10년 즈음 시간이 흐르면 긴토키가 이렇게 변했을 법도 하다는 생각이 점점 지배적이었다. 정말인가? 이 녀석이 한 말이 진실인가? 정말 이 녀석이 긴토키 본인이란 말인가? 의심에서 비롯된 불안함이 점차 물결을 만들어내며 번져갔다.
"......자세한 건, 그 녀석 앞에서 계속하지 그래."
가츠라가 대불당의 문을 열었다. 원체 구름 낀 하늘이라 어두웠지만 내부는 자연광조차 없어 더 어두워보였다. 보이지 않는 내부를 살피던 남자를 제치고 가츠라를 지나 타카스기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안에서 다짜고짜 소리치듯 말하는 타카스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래에서 온... 죽으라고... 간간히 들려오는 타카스기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가 가츠라는 제 뒤의 남자를 흘끗 곁눈질했다. 타카스기라면 아무리 흥분해도 명확하게 사실을 전달하고 있을 터였다. 마치 친구의 잘못을 일러받치는 어린 아이처럼 긴토키의 앞에 서서 사나운 얼굴로 사납게 쏘아붙이는 타카스기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그리고 그건 비단 타카스기뿐만이 아니었다. 잠잠해진 내부에서 곧 조근조근 이어지는 긴토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츠라는 그제서야 남자를 이끌고 들어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가츠라 역시 남자의 말대로, 긴토키가 시간이 흘러 성장했을 모습을 눈 앞의 남자의 모습으로 그려낼 수 있었다. 긴토키라면, 녀석이라면 저렇게 변했을 지도 몰랐다. 아니 단순히 머리가 짧아지고 사나운 들짐승 같은 면모가 많이 죽고 나사 빠진 면모가 더 강해졌을 뿐 남자는 긴토키의 성인 모습 그 자체로 보였다. 때문에 더욱 믿기 힘들었다. 그런 남자의 눈에서 체념과 포기 같은 것이, 어떤 슬픔 같은 것을 간직하고 있다는게 느껴졌을 때 그게 그가 말하는 미래와 긴토키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디는 걸 알 수 있었다. 가츠라는 주먹을 꽉 쥐며 불안함을 물리려 애썼다. 타카스기 역시 그로 인한 불안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 자명했다. 만에하나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로인해 긴토키가, 녀석이, 죽어야 한다면-. 오싹하고 짜증나는 생각을 떨치며 가츠라는 남자를 가운데 쯤에 무릎꿇게 했다.
제 어깨를 찍어누르는 가츠라의 힘에 혀를 차며 긴토키는 무릎을 꿇었다. 밖보다는 실내가 더 어두웠지만 그것도 차차 익숙해지자 잘 보이게 되었다. 기억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그저 텅 빈 불당 내부에는, 도난 당한 부처상을 놓던 자리가 크게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하얀 털뭉치 같은 것이 있었다. 긴토키는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로 이렇게 마주할 줄은, 지금 생생히 겪고 눈 앞에 보이는데도 믿기지 않았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하얀 진바오리를 입은 그는 이 어두운 실내에서 오로지 홀로 하얗고 밝아보였다. 편하게 등을 굽혀 한쪽 다리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고 있는 앳된 얼굴이 약 10년 전의 자신, 사카타 긴토키였다.
그의 옆에 서있던 타카스기가 뒤늦게 따라들어온 사카모토에게 가서 짧게 말을 주고 받았다. 가츠라가 문을 닫자 완전히 외부와 단절된 것 같았다. 그곳엔 양이 사천왕이라 불리는 네 명과, 긴토키 뿐이었다.
긴토키는 묘한 기분에 휩싸여 어린 저를 하염없이 살폈다. 타카스기에게 다 전해들은 것치고 눈에 보이는 반응은 없었다. 그저 뚱한 얼굴로 그 역시 저를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타카스기 녀석한테서 다 듣긴 했는데- 눈 앞에 두고도 영 믿을 수가 없긴 하네."
그보다는 나를 찾아온 게 당고가 아니라 실망이야... 조용한 실내에 퍼진 건 어린 자신의 목소리였다. 제 뒤에 벽처럼 포진한 세 사람이 와중에 태평한 소리를 하는 어린 저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았다. 뭐! 내가 뭘! 그렇게 항의하는 10년 전의 저 때문에 사카모토가 전혀 신나지 않는 톤으로 조금 웃었지만 오래가지 않고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곧 세 사람의 시선이 저를 주시하고 있다는 걸 느끼며, 긴토키는 10년 전의 저가 엉금엉금 기어 보다 가까운 거리에 앉는 걸 지켜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현실감이 없었다. 저렇게 못생긴 털뭉치같은 느낌이었나- 하는 쓰잘데 없는 감상도 들었다.
"-그래서, 뭐? 내가 죽어야 한다고?"
이거 다 장난이면 진짜 재미없는 줄 알아. 방울을 떼고 그 모가지도 똑 떼어줄테니까. 못마땅하다는건지 짜증이 난다는건지, 불퉁한 얼굴로 협박하듯 읊조리는 모습에 긴토키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5년 후의 제자신이, 저를 기다렸다는 마음이 이런 것이었을까. 떨리면서도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 5년 후의 자신도 그리고 저도, 사카타 긴토키라는 인간의 습성을 믿는 것이었다. 5년 후의 제가, 5년 전의 제자신이 자기를 해치워주리라 믿었던 것처럼. 긴토키는 10년 전의 제가, 10년 후의 제 소망을 들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2.
"어이 긴토키 군. 안녕하신가. 미래로부터의 전언이다. 이제 그만 죽어라. 넌 더 이상 살면 안돼."
장난스러운 말투를 하는 것치고 내용은 말도 안되게 잔혹하다는 걸, 말하는 긴토키 역시 잘 알았다. 아직 새파란 타카스기와 가츠라가 그 말에 불쑥 솟아오른 노기로 얼굴을 굳히고 있자니 역시 새파란 사카모토 역시 경멸하는 눈으로 저를 쳐다보면서도 둘을 진정시키는 꼴이 제법 추억을 되새김질 시켜서 우스웠다. 그런 난리통에서 고요하게 자리만 지키는 과거의 자신은, 역시 나잇대가 어려서 그런지 제밥 놀란 눈치였다. 아니 나이의 문제가 아니었다. 네 미래의 너 자신이라며 갑자기 죽으라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속으로 자조하던 긴토키는 문득, 동그랗게 뜨인 눈으로 저를 계속 주시하는 제 어린 자신이 좀 껄끄러워서 슬쩍 눈동자를 밑으로 내려 피했다. 그러자 바로 떨어지는 불호령에, 안 놀랄 수 없었다.
"피하지마."
긴토키는 하는 수 없이 저를 바라보는, 지금의 자기보다 눈썹과 눈이 제법 가까이 붙어있는 어린 시절의 제 자신과 눈을 마주했다. 10살이나 어린 과거의 사카타 긴토키는, 아니 현재 양지전쟁 막바지에서 백야차라는 무신으로 불리고 있는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미래에서 왔다며 다짜고짜 죽으라는, 어떻게 봐도 자기와 판박이인 인간을 뚫어지도록 쳐다봤다. 의미없는 시간이 지체없이 흐르자 타카스기와 가츠라가 눈을 찌푸리며 긴토키를 만류했다. 그만 긴토키. 너까지 어떻게 된 거냐. 저 정신 나간 녀석의 말을 믿는 건가! 하지만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긴토키가 둘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소리를 했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즈라, 타카스기. 이 녀석 나랑 완전 판박이잖아."
자못 심각한 표정을 보고 긴토키는 희망이 보였다. 아니 안 보이면 안되었다. 어린 제 자신이 점차 험상궂게 변해가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너라면 무시하지 않을 줄 알았어. 왜냐면, 그게 나란 녀석이니까.
"미래에, 무슨 일이 생겼기 때문에 죽으라는 거야?"
제 눈이 저런 색이었던가. 마치 갓 흘러나오는 피와 같은 눈동자였다. 그 눈동자에 담기는 제 모습이 마치 피로 이루어진 바다에 잠긴 것 같아 긴토키는 찰나에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도로 폈다. 이런 기분 나쁘고 못 볼 것 쯤이야 눈 앞의 녀석이 제 말만 잘 들어준다면 상관 없을 일이었다. 긴토키는 저를 담고 있는 제자신의 눈동자에서 불신이 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대신 그 빈 자리를 차지한 무언가가 생겼는데, 새로이 생긴 것은 우려일까. 상황의 전개가 이해가지 않는 가츠라와 타카스기, 사카모토는 심각한 얼굴로 긴토키만 바라볼 뿐이었다. 긴토키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저 녀석들, 무슨 긴토키 씨 보모인줄 압니까? 됐으니까 이제 그만 빠져줬으면 좋겠는데.
"그럼, 평범한데 죽으라고, 먼 미래에서 게으름뱅이인 네 녀석이 이렇게 찾아왔겠어?"
그렇게 말하며 웃는 모양새가 저희가 아는 긴토키와 판박이어서 가츠라를 비롯한 셋은 움칠 몸을 굳혔다. 믿을 수 없다. 말도 안된다. 하지만 저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긴토키는 이제는 10년 후의 제 자신의 양 팔을 두 손으로 붙들었다. 포박된 그의 몸은 어려움없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었다. 긴토키는 몇 번이고 입술을 뻐끔 거렸다. 쉬이 떨어져나오지 않는 말을, 분명 눈 앞의 제 자신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묘한 표정을 지을리 없었다.
"네가... 네가 진짜, 내 10년 후의 미래라면, "
어쩐지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아 스스로가 꼴사나웠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 녀석이라면, 내가 모르는 해답을 알고 있다. 이 녀석이라면, 해답을 줄 지도 모른다. 그런 막연한 기대가 제 자신을 몰아세웠다. 분명, 너라면 알겠지.
"우리는, 선생님을 되찾았나?"
그 질문에 가츠라와 타카스기가 소리 없이 놀란 건 두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었다. 간간히 들려오던 '선생님'이란 작자를 잘 모르는 사카모토만이 의문을 품고 상황을 살폈다.
기분 나쁜 정적이 흘렀다. 긴토키는 제가 물어놓고도 속으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스스로를 질책했다.
긴토키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에 대한 놀라움과, 생각보다 예측이 쉬운 단순한 제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어찌할 지 머리를 굴렸다. 자세히 말해주고픈 마음은 없지만, 10년 전의 제가 물은 것 정도는 예스 오어 노로 대답해줄 의향이 있었다. 다만 그 대답을 진실로 말해줄지 아니면 선의의 거짓말로 말해줘야 할지는 미처 정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거짓말로 잘 구해냈다고, 저 둘만 있어도 분명 확실하게 구해낼 수 있으니 네 빈자리는 걱정말라며, 죽기 직전에 미련을 남기지 않게 해야하는 걸까. 아니면 곧죽어도 거짓말은 못하니 그저 사실대로 말해주어야 하는 걸까. 보통은 선의의 거짓말을 해서라도, 보다 더 중대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잘 구슬려야 하겠지만, 긴토키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대체 어쩌면 좋은 거람. 잠깐 동전 던지기라도 해서 정하고 싶은데 말이지. 말을 위해 연 입은 바싹바싹 말라 있었다. 괜히 갈증이 타는 듯해서 긴토키는 애꿎은 침만 몇 번이고 삼켰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을 하고 재차 입을 열었다.
"아니."
심드렁함이 푹푹 묻어나오는 가는 목소리가, 단호하게 공간을 채웠다. 긴토키가 재빨리 가츠라와 타카스기를 살폈지만 예상대로였다. 긴토키는 둘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어린 자신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린 선생님을 되찾지 못 해. 그리고 그건, 미래든 과거든 뭐가 바뀌어도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
아예 희망의 싹을 잘라놓는 것이 제 방식이었다. 긴토키는 그리 말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10살이나 어린 자신의 얼굴이, 허탈함과 비통함으로 물들어가는 걸 지켜보는 건 별로 볼 게 못 되었다. 그리고 그건 미운 정이라지만,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카모토는 심상치않은 셋의 반응에 잔뜩 긴장해 있었다. 확실히, 조용히 꿀먹은 벙어리가 된 자기 자신보다는 과거에는 좀 더 적극적이었던 가츠라와 타카스기의 위험도가 높았다. 그리고 그 생각을 바로 증명해주듯, 비명과도 같은 호통이 떨어졌다.
"거짓말마!!"
파랗게 질린 주제에 노발대발하는 꼴이 자못 안쓰럽기까지 했다. 곧바로라도 이성의 끈을 놓을 것만 같은 타카스기의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거렸다.
"그런!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이야, 긴토키 씨는 착한 어른이라 거짓말을 못 한다구."
격정에 찬 말허리를 자르며 긴토키는 제게 다가온 타카스기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제 멱살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무너져내렸을 타카스기의 얼굴이, 안 봐도 뻔했다. 긴토키는 타카스기와 10년 전의 자신을 피해 틈으로 보이는 가츠라에게 주목했다. 가츠라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어딘가를 보며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서 한 결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되려, 이렇게 말해주면 혹시나 다른 선택지가 생길까 하는 마음에. 혹여나 새로운 미래가 그러질 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그런 헛된 바람 때문에.
"미래에는."
그 때, 침묵을 깨고 나온 것은 긴토키였다.
"미래엔, 선생님을 되찾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단 거야...?"
가늘게 이어진 목소리에 타카스기가 긴토키를 돌아보았다. 늘 동태눈에 졸린 표정이었던 얼굴이 허망함을 담고 있었다. 타카스기는 갑자기 모든 것이 부질 없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아니 적어도 내가, 너와 나만큼은, 무슨 목적으로 전장에 나온 것인데. 여전히 믿지 못 했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그건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다. 눈 앞에, 고지를 둔 탈출구를 보고 마지막 힘을 짜내 달려가고 있는 것을, 탈출구 앞에 선 사신이 미리 말해주는 것과 같았다. 여긴 탈출구가 아니라고. 또 하나의 미로의 입구라고. 그건 믿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긴토키. 어째서냐. 어째서 넌 그런 걸 묻는 거야.
"지금 네가 목 매는 것 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여기는 것들이, 미래에 있어."
나직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그에게서는 처음 보는 감정을 담고 있었다. 가츠라도 타카스기도, 사카모토 역시 그 남자에게 시선을 두었다. 남자는 지금껏 보지 못 한 감정을 담고 흐릿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긴토키는 그의 입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짧은 수 초간, 남자가 내뱉은 것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지금, 제가 목 매는 것 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여기는 것들. 지금보다도 더, 몇 배나 더 소중히 여길 것들이. 그럴 것들이, 미래에. 그 미래. 전혀 생각도 해보지 않은 미래에,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것들이 손에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선생님보다도, 가츠라와 타카스기 녀석 보다도. 타츠마와 다른 밥팅 녀석들 보다도.
"지금의 너는 모를거다. 상상도 못 할 걸. 악연인가 싶지만서도, 재밌는 녀석들이지. 그런데 그런 녀석들이 미래에서 고통받고 있어. 그럼, 사카타 긴토키, 네 녀석이 그런 걸 두고 볼 녀석이냐? 당연히 아니지. 그래서 나도 발에 땀나도록 뛰다녔고, 결국 없는 해결책을 겨우겨우 만들어 낸 방법이 이거야. 과거의 네가 죽는 것. 백야차 시카타 긴토키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
-그걸로 넌 완벽히 지켜낼 수 있어.
긴토키의 눈이 커졌다. 마치 마술사 같은. 말도 안되는 상황의 연속에서 말도 안되는 부탁을 들었다. 그리고, 말도 안되는 결말을 들었다. 선생님도 구하지 못한 주제에, 지금 얼굴고 모를 미래의 인연을 위해 죽으라고? 처음에는 너무 아연했지만 그걸 말하는 얼굴이 너무 진중했다. 분명 저런 얼굴일 것이었다. 자기가 진지하고 심각한 이야기를 할 때면. 똑같은 머리색, 똑같은 눈동자색, 똑같은 이목구비. 한 가지 다른 거라곤 시간의 흐름 뿐이었다. 타카스기처럼 멱살이라도 잡고 어디서 그런 귓구녕으로도 안들어갈 소리를 하느냐고 타박하고 싶었지만 남자의 얼굴은, 눈은 너무도 외면하고픈 진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정말 마술사같이. 어느새 홀려 있는 자신이 있었다. 결정적인 한 방이 컸다. 그렇게 지켜낼 수 있다고. 완벽하게 지켜낼 수 있다고.
"한 가지 말해주자면, 걱정마라. 그 미래는, 이 녀석들도 모두 포함이거든."
마치 부추기는 것처럼 감언이설을 흘린다.
"...다른 동료들은?"
"...잊었어? 여긴 전장이야."
그러면서도 또 이렇게 쐐기를 박는다. 그렇지, 맞다. 내가 잠시 잊고 있었다. 잠시 안일한 생각을 했다. 그럼 뭐야. 이 세 녀석들이라도 무사히 살아남은 것에 감사해야하는, 뭐 그런 건가? 혼란은 가중되고 이미 마음은 기울어 있었다. 타카스기가 긴토키와 눈높이를 맞추며 제법 거칠게 어깨를 틀어쥐었다.
"어이 긴토키...! 너, 저 사기꾼 자식의 말을 믿는 거냐?!"
가까운 거리에서 소리치는 통에 귀가 아팠다. 긴토키는 타카스기를 제 뒤로 물리며 입을 다물었다. 나도 알아. 나도 안다고. 미래에서 왔다며 다짜고짜 죽으라는데, 그걸 홀랑 믿을 바보가 어딨냐. 하지만, 하지만 거짓말이라고, 사기꾼이라고 하기에 남자는 너무도 진실돼 보였다. 그 눈에 담긴 감정과 의지가, 어쩐지 기시감을 불러 일으켰다. 언젠가 저런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기억을 헤집자 나오는 것은, 스승을 잃고 전쟁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던 제 자신의 얼굴이 아닌가.
"......사기꾼인지 아닌지는 확인해보면 될 일이지."
그렇게 말하며 긴토키는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묘한 호선을 그린 남자와 숫제 딱딱하게 굳은 긴토키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뭘 하려고... 타카스기를 비롯한 셋은 그저 얼굴을 찌푸리고 지켜보았다.
"내가 어릴 적에 불렸던 이름은?"
"난 또... 뭘 하나 했더니만. 문답 퀴즈라도 하자 이거야?"
"빨리 말해."
"예이예이. 믿어주신다는데 못 할 건 없지."
남자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시체를 먹는 악귀."
그 얘기를 듣고 사카모토가 얼굴을 굳혔다. 부모도 모른채 전쟁터에 버려졌단 이야기는 들었지만, 어린아이에게 붙는 것 치고 그렇게 말도 안되는 별명이 있는 줄을 몰랐던 것이다. 어렴풋이 알고만 있던 가츠라와 타카스기 역시 놀라서 긴토키에게 눈을 못박고 있을 뿐이었다. 한번도 자기 과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던 녀석이었다.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런 녀석이 무슨 심정으로 저걸, 저희 앞에서 꺼낸 것인지 어렴풋이 그의 생각이 읽혀서 치가 떨렸다. 그보다 남자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던 것인가. 정말, 정말 저 남자의 말이 진짜라면... 그런 불안한 생각에 입술을 깨물던 가츠라는 다시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그건, 꽤 어렵지만 마음만 먹으면 알아낼 수 있어."
긴토키는 동요하지 않은채 남자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남자는 계속 여유로운 분위기를 흘리고 있었다. 문제를 내는 건 이쪽이고 목숨이 위태로운 건 저 쪽인데, 저 쪽이 더 여유로운건 무슨 경우란 말인가. 긴토키는 여유만만인 그의 작태에 반해 혼란스러운 제 상태에 신물이 났다. 좀 더, 개인적인 질문을.
"기억하는 것 중에서, 제일 처음으로 먹은 건 뭐지?"
남자의 눈이 조금 커지는 게 보였다. 무슨 의미일까. 답을 모르는 걸까. 아니면 의외의 질문인 걸까. 남자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를 직시하는 새빨간 눈동자가 제법 숨막혔다.
"고기."
긴토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가츠라를 비롯한 셋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전쟁 터에서 시체를 먹는 악귀라고 불린 아이가, 고기를 입에 댈 수 있었을까? 그런 의문에 해답을 주듯, 곧바로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인줄 알았는데 아니었지. 지금에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불에 탄 시체의 일부라는 것쯤은, 너도 잘 알잖아."
셋이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것은 상관없는 일이었다. 긴토키는 어린 제 자신의 너머로 보이는 셋의 표정에서 눈을 돌리고 아직 솜털이 나있는 저를 바라보았다. 동요하지 않는다. 그래. 이 무렵이면 많이 흐릿하고 조작된 기억 속에서도, 그 때의 기억만큼은 생생하게 살아나서 확실히 구분하고 정의내릴 줄 알았다. 그렇게 확실히 한 기억들은 저를 괴롭히곤 했었다. 눈들을 피해 몰래 토하기도 하고 간혹 배를 굶기도 했다.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정황상 그리고 뚜렷해지는 기억 속에서 그것은 확실한 인육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가 제일 잔인했다. 끔찍하다는 사실도 아니 더 정확히는 그게 사람이라는 사실도 제대로 알지 못했을 나이였다. 그저 살기 위한 본능으로, 먹을 수 있어 보이는 것을 집었을 나이였다.
"있지, 나 웬만하면 그거 기억하고 싶지 않거든. 너도 그렇잖아. 설마하니 싫어하는 기억을 물을 줄은 몰랐다 야."
그렇게 툭 뱉어놓는 모양새가 점점 더 신빙성을 갖췄다. 긴토키는 눈 앞의 남자에 대한 신빙성이 높아질 수록, 제 죽음이 멀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같잖은 말에는 놀아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혹시나, 라는 것이 있었다. 정말, 믿고 싶지 않지만, 그가 말한 게 전부 사실이라면. 눈 앞의 남자가 제 자신이라면.
"......내가 가장 처음으로 벤 건?"
그렇다면 자신은 언제든 그가 말한대로 간신히 손 안에 쥐고 있는 소중한 이들을 위해서-
"...그 때 당시 우리나이 또래의 꼬맹이였지."
버릴 수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지켜낼 수 있다면야, 언제든 기꺼이 목숨을 받칠 준비가 되어있었다.
긴토키는 어린 제 자신의 뒤에서 하얗게 질린 얼굴들을 보다가 혀를 찼다.
"미리 말해두겠는데 죽지 않았어, 그 꼬맹이는 그냥 좀 다친 것 뿐이었다고."
물론 그 사건을 계기로 전쟁터에 내몰린 어느 어린 아이에대한 박해가 심해졌고, 또 그로 인해 그 어린 아이는 칼을 몸에서 한 시라도 떼지 않았고 강해지기를 갈망했다는 후일담이 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제 말에 조금 굳은 기색을 푸는 셋을 보다가 다시 눈 앞의 자기 자신에게로 눈을 돌렸다. 푹 숙인 고개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긴토키는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이렇게 의심이 많은 놈이었던가.
"자, 잠깐...! 기다려보게... 지금, 저 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결국 저 미래의 긴토키라는 자도 죽는 거 아닌감?"
사카모토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남자도 긴토키도 흘끗 사카모토를 곁눈질했다. 긴토키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남자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정답이야 타츠마 군."
말문이 막힌건 당연지사였다. 타카스기도 가츠라도 태연한 남자의 태도에 놀라 소리없는 탄성을 내질렀다. 남자의 말대로라면, 과거의 자기자신보고 죽으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기 존재를 지운다는 거나 다름없었다.
세 명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남자는 언제쯤 자기를 믿어줄 거냐며 투덜대었다. 긴토키는 차분한 시선으로 남자를 응시했다.
"뭐, 다른 거라도 더 말해줘? 그 이후에 선생님을 만나는 이야기라도?"
선생님이라는 단어에 바로 반응한 가츠라와 타카스기가 저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이미 그의 기억 속에는 흐릿한, 앳된 친우들의 얼굴을 보니 긴토키는 괜스레 피식피식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아니, 됐어. 그 정도면 됐다."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드는 얼굴에 긴토키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역시 나야. 믿음을 배신하지 않는 군. 결의에 찬 붉은 눈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장애물은 긴토키의 뒤에서 마치 배수진이라도 치는 것처럼 서있던 세사람이었다. 검을 들고 일어나려는 어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긴토키는 눈살을 찌푸렸다.
"긴토키!"
긴토키가 남자를 일으키자 사카모토가 안절부절해 하며 다가왔다.
"그만. 거기까지, 타츠마."
긴토키가 검을 내밀며 사카모토를 거부했다. 가츠라와 타카스기는 긴토키의 결정이 충격적이었는지 우두망찰 서있었다. 혼란스러워하는 눈길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모를리 없는 긴토키는 되도록 둘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긴토키... 잠깐, 자네. 뭔가. 어디로 가려는 겐가? 정말 그 남자의 말을 믿고,"
"믿어. 타츠마 너도 눈이 있으면 보일 거 아냐. 이 녀석은 미래의 나다. 확실해. 그걸 검증하는 건 너희도 들었잖아."
단호하게 말을 내뱉는 긴토키와 달리 사카모토는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서, 지금 죽으러 가겠다는 겐가?"
"미래의 전언이라잖냐."
"긴토키!!"
원체도 목소리가 큰 녀석이었지만 보통 이렇게 감정을 담아 큰 소리 치는 경우는 드물었다. 남자의 밧줄을 풀어주던 긴토키가 행동을 멈추고 사카모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색이 안좋은 사카모토가 절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긴토키, 이건, 아직 사실확인이 되지도 않은 일 아닌가! 좀 더 시간을 두고 기다려보세. 좀 더 그 남자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명확해질 때까지...! 하다못해 그 남자의 말이 정말 사실이라 쳐도 자네가 이렇게 바로... 지금 당장 목숨을 내어줄 필요는 없잖은가!"
"아니,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죽는게 좋아."
절절한 사카모토의 목소리를 무너뜨린건 조용히 있던 남자였다. 긴토키와 똑같지만 좀 더 힘이 빠진 목소리로, 포박당해 있는 동안 뻐근했던지 손목을 돌리며 그가 입을 열었다. 사카모토는 저를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가 하도 익숙해서, 착각할 것만 같았다.
"지금 미래는 시간이 흐르는 만큼 계속 사람들이 죽어나고 있어. 사망자를 더 늘리지 않으려면, 네가 빨리 죽는 것보다 더 좋은 건 없다."
긴토키는 남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여기서라도 당장 배를 가를까? 아님 네가 목이라고 쳐줄래? ...일단 옆문으로 나가서 산에 오르도록 하지. 뭐 좋을 거 있다고 사람들 있는데서 죽냐. 오. 그건 그렇네. 게다가 내가 워낙 유명해야지. 분명 안좋은 소리가 나올게 뻔해. 두 사람의 대화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태평하며 거침없었다. 문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움직임에, 사카모토가 다급하게 긴토키를 불렀다.
"긴토키 기다려 보게!!"
"읏......!!"
남자와 긴토키의 발을 묶은건 사카모토의 목소리가 아니라 가츠라와 타카스기의 기습이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들은 다분히 불만을 넘어선 분노를 담고 있었다. 긴토키는 눈살을 찌푸리며 남자를 제 등 뒤로 물렸다. 두 사람의 갑작스런 일격을 막아냈던 검집이 기어코 부서져서 조각이 떨어지고 있었다. 살기는 없었지만 검을 통해 느껴지던 그 힘 만큼은 진심이었다. 긴토키는 귀찮게 됐다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남자는 무심한 얼굴로,
"최대한 빨리."
하고 말할 뿐이었다. 긴토키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야야, 뭐하는 거냐 즈라, 타카스기."
"그러는 너야말로 뭐하자는 거야......!"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설움을 참아내며 가츠라는 검을 고쳐 잡았다. 어떻게 그렇게 간단히 결정을 내릴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렇게 간단히 네 목숨을 내어줄 수가 있단 말이냐. 아직도 친우가 한 선택으로 인해 머릿속은 혼란스러웠지만, 지금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가츠라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막아야 했다. 그렇게 쉬이 제 목을 주려는 친우를, 이렇게 어이없게 잃을 수 없었다. 절대로 내보내서는 아니됐다.
"긴토키, 검을 내려놔."
"...지금 검을 든 건 너희들이 거든요? 난 검집에 넣고 있거든요?"
"긴토키!! 얌전히 말 들어!!"
타카스기의 눈이 번뜩였다. 그 역시 가츠라와 다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붙잡혀간 스승의 목도, 동료들을 앗아간 이 전쟁의 승패도 그 어느것 하나 중요하지 않았다. 눈 앞의 긴토키를 막는 것만이 급선무였다.
"널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러면 우선 너나 칼 좀 집어넣지 그러냐."
"긴토키!"
"막지말란 말야 요녀석들아...! 다 들었잖아! 너희야말로 더 잘 알거 아냐...!"
내 뒤에 녀석은 아니, 내 미래의 나라는 놈이 한 말은 거짓이 아냐. 너희라면 잘 알거 아냐. 난... 그리 말을 흐리는 긴토키에 가츠라는 할 말을 잃었다. 긴토키는 조용히 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무안하고 미안한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이라는 걸, 다 년간의 함께한 시간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너희가 이럴 필요 없는 일이야. 평화롭게 가자, 평화롭게."
그리 말하며 긴토키는 검을 든 팔에서 힘을 뺐다. 타카스기는 이를 갈았다. 끓어오르는 화가 금방이라도 목구멍을 태우고 제 몸을 녹여버릴 것 같았다.
"막지마, 즈라. 타카스기."
가게 내버려둬주라... 그렇게 중얼거리는 긴토키의 눈이 진중했다.
"그럼 가만히 앉아서 네 놈이 죽는 걸 두고보라는 거냐?!!!"
그렇기 때문에 더욱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거였다. 잘 안다. 네 놈이 어떤 녀석이기에 미래의 너라는 녀석이 시간을 거슬러 여기까지 왔는지, 와서 하는 소리가 자기 존재를 없애려 왔다는 그런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을 하는 네가 어떤 녀석인지 알기에, 또 그 말을 듣고 순순히 죽으려드는 네 놈이 어떤 녀석인지 예부터 쭉 봐와서 알기에. 믿지 않으려 해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네가 한 질의응답이 아니어도 이미 가슴 어느 한 구석에서부턴 그 남자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남자의 붉은 눈이, 너와 같은 힘 빠진 낯짝이 사실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었다. 미래에서 왔다는 놈이나 그 말을 듣고 홀랑 죽겠다고 일어서는 놈이나 도대체가 제정신인가 싶다.
타카스기가 검을 고쳐 잡았다. 남자가 이건 안좋군...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긴토키 역시 미간을 구겼다. 타카스기의 두 눈이 야밤의 맹금류의 것처럼, 살기를 담아 빛나고 있었다.
"즈라, 넌 긴토키를 기절시킬 셈이었겠지?"
가츠라는 말 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긴토키가 잔뜩 구겨진 얼굴을 한 가츠라에게로 슬쩍 시선을 던지다가 거두었다. 타카스기는 그 모습이 우스웠다. 막지 않길 바라면서 또 저희와는 칼을 겨누고 싶지 않은 마음이 그에게는 독이 될 터였고 제게는 기회가 될 터였다. 긴토키는 가츠라에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슬쩍 타카스기를 보다가 천천히 검집을 빼내 남자에게 던졌다.
그의 손에 들린 검 한 자루. 나름 신경을 써서 관리한 검은, 신경을 썼음에도 잔뜩 닳고 이가 빠져있었다. 그리고 그건 가츠라와 타카스기, 사카모토도 마찬가지였다. 이 빠진 칼날을 보며 타카스기는 더더욱 이를 악물었다. 다 닳은 검만 보아도 그가, 긴토키가 보내온 시간들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때문애 화가 나는 거였다. 그렇게 이가 닳도록 검을 휘두르며 동료를 지키고 살아남은 건 왜였나. 긴토키 우리가 한 약속은? 우리가 전쟁에 참전한 이유는? 우리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는, 이 전쟁을 통해 되찾고자 하는 건? 넌 그것들을 전부 버리고서라도, 불명확할 미래를 지키기 위해 네 한 목숨 받치겠다는 거냐? ...그렇게는 못 둔다.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다.
난감해하는 기색도 잠시, 긴토키는 평소와 같이 말을 하고 평소와 같이 움직였다.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상황이기에 더더욱.
"하아... 네놈들은 평화란 말을 모르는 거냐? 앙? 어디 해보셔. 내가 호락호락 당해줄거 같으냐."
"네말대로다 긴토키. 넌 호락호락 당할 녀석이 아니지. 그렇기에, 난 널 다치게 하더라도 막을 거다. 설령 피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렇게 해서라도 막을 거다."
"타카스기!"
근심에 찬 가츠라가 타카스기를 돌아보았으나 그는 이미 결심을 굳힌 후였다. 이글거리는 두 눈을 마주하며 긴토키도 검을 고쳐잡았다. 가츠라는 내심 그럴 줄 알았다는 눈치로 이제는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검을 고쳐잡자, 불당 내부의 기류가 심상치 않았다.
사카모토만이 안절부절하며 머뭇거렸다. 사랑하는 동료들끼리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될 줄은, 그는 꿈에도 생각 못했기 때문이었다. 더더욱이 셋 다 그 명성을 날리는 동문들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인 것처럼 보였지만 그만큼 셋 만의 보이지 않는 유대도 강했다. 사카모토는 어떻게 이 상황을 말려야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말리지 않으면 저 세 사람 간에 누군가는 꼭 부상자가 나올 터였고 그렇다고 말리면 그대로 긴토키가 떠나서 멋대로 죽어버릴 터였다. 사카모토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무엇을 해야하는 지도 몰랐고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무력함 속에서 떠는 사카모토를 오로지 10년 후의 긴토키만이 보고 있었다. 앞에서 대치 중인 이들을 보다가 다시 사카모토에게로 시선을 돌린 그는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타츠마."
첨예하게 날카로워져있던 신경을 무디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가츠라와 타카스기, 긴토키마저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를 살폈다. 긴토키에게서 건네받은 검집을 쥐고 쳐다보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가츠라와 타카스기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는 아니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누구누구와 똑닮은, 아니 똑같을 그 눈에 둘은 더더욱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더더욱 긴토키를 보낼 수 없었다. 말도 안된다. 언제인지도 모를 까마득하게 먼 미래를 위해 죽으려는 긴토키에게 서운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무겁고 배신감이라기에는 안타깝고 애달픈 감정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이름을 불린 사카모토 역시 둘과 같은 생각을 했다. 사카모토는 아까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니었음을 인지했다. 그 붉은 눈을 보고 있자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그 남자 본인이었다. 저 남자는 긴토키 본인이 맞았다. 그렇기에 더욱 말도 안됐다. 세상 어느 존재가, 과거로 날아와 저를 죽이려 한단 말인가. 도대체 너란 녀석은 어떻게 돼먹은 녀석이란 말이냐. 자신의 존재를 지워서까지 지키려는 미래라니. 사카모토는 남자의 앞에서 흔치않게 굳은 얼굴의 긴토키를 노려보았다.
"...뭐라고 해도, 나 역시 즈라와 타카스기와 같은 생각일세."
"하지만 이 중에서 네가 제일 융통성있는걸."
남자의 대화는 마치 수십년 동안 해묵은 친구처럼 편했다. 사카모토는 점차 무서워졌다. 갑작스러운 대화의 시작이 무슨 흐름을 만들지, 남자가 할 말이 어떤 식으로 제게 영향을 끼칠 지 무서웠다.
"타츠마. 넌 넓은 시야를 가진 녀석이잖냐. 네가 보기에 너희가 이 전쟁에서 승리할 거 같아?"
그건... 사카모토는 흔들리는 눈으로 입을 다물었다. 가츠라와 타카스기가 눈을 부릅뜨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냐 네 놈...!!"
"넌 입닫고 있어봐 타카스기 군. 난 지금 아직 새파랗게 어린 미래의 사장님에게 묻고 있는 거거든?"
아. 미래를 미리 스포해주면 안되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남자는 긴토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앞으로 나섰다. 남자의 눈이 사카모토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미래의 사장님? 그게 내 미래라고? 사카모토는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꿋꿋이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불편하다면 거짓말이지만 불편하기 이전에 너무나도 친숙한 눈이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사카모토는 흔들리는 저를 감추며 남자를 매섭게 바라보았다. 남자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렇게 노려보면 긴토키 씨 상처받는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타츠마."
재차 묻는 남자에 사카모토는 제 동료들을 살폈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얼추 알 수 있었다. 의문을 품은 가츠라와 타카스기, 그와 반대로 차분한 긴토키의 시선이 간간히 맞부딪혔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는 긴토키 본인이, 아니 저 치는 긴토키가 맞았다. 긴토키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로지 긴토키에게만 속내를 내비쳤던 사카모토는 남자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원래도 싸움이니 전쟁같은 건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평화주의자가 전장의 한 가운데서 본 건 지독한 패배의 기운과 상실의 슬픔 뿐이었다. 사카모토는 입 안 가득 퍼지는 씁쓸함을 물리며 마음을 다졌다. 뒤늦게 화력을 대주었어도 이미 기울기 시작한 승패를 뒤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대로 스러지는 것은 미련한 짓이었으나 그렇다고 이제 와 쉬이 포기하고 멈추기에는 희생된 동료들의 피가 짙었다. 이래서는 희망이 없다. 이렇게 아등바등 싸우기보다는 더 큰 가치를 좇아 대적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해. 저들에게 대적할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어 힘의 균형을 맞추면 분명 평화도 멀지 않으리라. 지구인들고 천인둘도 누구 한 명 피 흘리는 사람 없이. 그런 밝은 미래를 떠올리고 지우기를 수 차례. 매일 밤하늘을 바라보며 수십번도 더하게 했던 고민을, 남자는 마치 아주 손쉬운 문제를 푸는 것마냥, 이리 쉽게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지 뭐.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동료는 그렇게 무겁고도 진지하고 단순한 답을 내려주었다. 사카모토는 긴토키에게 말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제 뜻을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전장에 붙어있을 뿐 사카모토는 차근차근 준비해가고 있었다. 후원자 모집, 자금 알선, 무기 조달 등 원래 맡고 있던 일들을 다른 이에게 조금씩 물려주며 떠날 채비 중이었다. 제 꿈이 틀린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동료들을 버리고 가는 것만 같아 무거운 죄책감에 시달렸다. 때문네 아직 가츠라와 타카스기에게는 넌지시 분위기만 풍길 뿐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 중간다리를 자처한 긴토키만 믿으며 시기를 엿보고 있었다. 둘 역시, 긴토키와 다른 답을 주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제 스스로 느끼는 죄책감에 억눌려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 터였다.
승리? 이 전쟁은 이미 막바지에 접어들었고 이제와서 승기를 거머쥘 가능성은 쥐꼬리만큼도 안보였다. 그나마 잔존세력들이 각지에서 농성 중이지만 저들과의 기술력은 차원이 달랐고, 무엇보다 시대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다. 이 전쟁은 패할 거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동료들을 버리고, 우주로 떠나갈 생각을 한다.
눈 앞의 싸움보다는 그 너머를 내다보며, 좀 더 큰 것들을 낚기 위해. 피가 흐르지 않을, 천인과 지구인 모두가 어우러질 평화를 손에 넣기 위해. 보다 먼 미래를 꿈꾸며, 이상을 이루기 위해.
대의를 위해.
"타츠마. 난 대의를 따르는 거야."
사카모토의 눈에, 빙긋 호선을 그리는 입가가 비쳤다. 사카모토는 그의 말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어떻게 보면 일종의 명령과도 같았다. 참 잔인한 남자다. 남몰래 말해준 이상을 이런 식으로 써먹다니.
사카모토가 이를 악물며 고개를 푹 숙이자 남자는 몸을 돌렸다. 그가 긴토키에게 이만 가자고 말하자 긴토키가 얼떨떨하면서도 애석한 얼굴을 했다. 타카스기와 가츠라의 경계가 무색하게 두 백발은 재빨리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태도의 변화, 그보다 저희를 무시하는 행동에 놀라 가츠라와 타카스기가 몸을 굳혔다.
"잠깐- 긴토키!!"
"젠장, 갑자기, "
긴토키를 향해 뛰어들려던 둘은 저희를 잡아 멈춰세우는 힘에 움직일 수 없었다. 곧바로 고개를 돌려 저희를 멈춘 것을 확인했다. 사카모토였다.
"무슨?!"
"사카모토!!"
목이 터져라 소리쳐도 가츠라와 타카스기의 어깨를 붙잡은 손은, 아프도록 둘을 잡아 붙들었다. 열린 문으로 이미 두 사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가츠라와 타카스기는 미치도록 애가 탔다. 자살하는 것은, 아무리 흉기를 가지고 있다해도 말 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제일 방해가 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지금 긴토키는 두려움은 커녕 죽음 마음을 품었다. 더군다나 무신이라고 불리는 녀석이었다. 어디가 사람의 급소인지는 본능적으로 잘 알던 녀석이었다. 칼을 가져간 만큼 지금의 긴토키에겐 자살만큼 쉬운 건 없을 터였다. 긴토키를 놓친 이 잠깐의 틈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눈 앞이 아찔했다.
"이거 놔!!! 사카모토, 너 긴토키를,"
"미안... 미안하네......"
이를 갈며 몇 번이고,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쏘아보아도 사카모토는 망부석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묵묵부답이었다. 둘의 어깨 위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사카모토의 발치로 툭툭 물방울이 떨어졌다.
결국 가츠라와 타카스기는 사카모토의 배와 팔을 가격하고 나서야 풀려났다. 비속어를 내뱉으며 한시라도 빨리 긴토키를 찾기 위해 문으로 향하자, 분면 약한 힘이 아니었음에도 충격이 없어보이는 사카모토가 둘의 앞을 가로막았다.
"사카모토!!!"
시뻘건 핏줄이 선 눈동자 네 개가 사카모토를 죽일듯이 노려봤지만 사카모토도 비켜줄 수 없었다. 결국 칼을 겨누는 흉흉한 살기를 온몸으로 감지하면서도, 그보다 더한 슬픔에 사카모토의 눈물 또한 멈추지 않고 계속 흘렀다. 미안하네. 미안하네. 나는...
"녀석을, 긴토키를 막을 수 없네......"
"너...라기 보다는 나 진짜 나쁘잖아. 사디스트냐? 사디스트인 거냐?"
"무슨 소리야. 원래 난 어릴 때부터 될성부른 사디스트 떡잎이었다고."
두 명의 긴토키는 사원 뒤에 있는 작은 바위산을 올랐다. 작기는 하지만 그래도 높이는 어느 정도 있어서 이 사원에 자리를 잡은 이후 간간히 긴토키 홀로 올라오던 곳이었고, 때문에 지리에 훤했다. 듬성 듬성 나있던 나무도 중간은 꽤 빽빽하고 그 위에는 돗자리를 깔고 누워도 될만큼 평평한 부분이 꽤 넓게 자리하고 있었다. 거기로 가면 나무에 가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일 일도 없이 조용히 끝낼 수 있었다.
사카모토를 몰아세운 남자에게 혀를 내두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가츠라와 타카스기에게 칼을 겨누지 않은 건 다행이었지만 사카모토에게 무거운 짐을 쥐어준 것이다. 먼 미래를 내다보며 제 이상을 신나게 떠들어대던 사카모토의 모습이 떠올라 긴토키는 혀를 찼다.
거침없이 올라가는 남자를 보며 긴토키는 새삼스레 신기했다. 미래의 제 모습을 궁금해해 본 적도 그려본 적도 없지만,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보다 조금 더 큰 키에 좀 더 튼튼해 보이는 체격. 안타깝게도 그 놈의 곱슬머리는 대책이 없었는지 여전했다.
"저런 식으로 헤어지면 타츠마한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게 되지 않아?"
언제 가츠라와 타카스기가 사카모토를 제치고 과거의 저를 찾아 다닐지 모를 일이었다. 약간의 조급함이 섞여 산을 타느라 거칠어진 숨을 뱉는 긴토키는, 제 뒤에서 저보다는 고른 숨을 쉬고 있는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 눈에 서린 걱정과 불안을 읽고 긴토키는 못말린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확실히 제 친우들을 그렇게 내버려두고 온 건 여러모로 문제가 되는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 상황에서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직접 대치하던 과거의 그가 더 잘 알테지만, 마지막을 그렇게 칼을 겨누며 끝내고 싶지 않았다. 미래의 인연들은 제 존재 자체를 잊을 지라도, 여기 있는 친우들은 적어도 사카타 긴토키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잊지 않아줄 녀석들이기에.
"너도 알다시피 그 녀석은 머리가 빈만큼 통도 큰 남자다. 그 정도 짐은 어디 우주 변방에다가 내다버리고 훌훌 털어낼 녀석이지."
신랄한 평가에 긴토키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나 어떻게 죽어?"
나뭇가지를 헤치던 긴토키의 손이 멈칫하다가 다시 움직였다. 의외의 질문에 긴토키가 눈썹을 치뜨건말건 10년 전의 긴토키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네가 날 베어도 결국은 자살하는 게 되잖아?"
"뭐... 그렇게 되는 거겠지. 네가 곧 나니까."
"아니지. 네가 곧 나지. 뭐 그렇담 그냥 내가 알아서 하는게 낫겠군. 아무리 미래의 나라지만 다른 사람 손에 죽는 것 같아 영 꺼림칙하거든."
아직 머리에 피도 덜 마른 꼬맹이가... 긴토키가 어이가 없어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다가도 그 꼬맹이가 저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떡하냐. 역시 할복은 무서워. 아파서 싫은데."
당연하게 할복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뒤를 돌아보자 괜한 생각을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곧 죽을 이처럼 보이지 않는, 태평한 낯짝으로 그리 말하는 본새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긴토키는 코웃음을 쳐주었다. 흥. 꼴에 무사라고 당연히 할복을 택하는 거냐? 아, 아니거든...!?
"걱정마라. 지금 네 녀석 나이로부터 15년 전의 너는 거뜬히 해냈거든."
눈에 어리는 상념 속에서, 석양을 받으며 숨이 꺼져가던 5년 후의 제 자신을 떠올렸다. 저주스러운 복장을 하고 증오스러운 명줄을 이어나갔을 그가.
긴토키는 10년 후의 제 말을 듣고 놀라서 입술만 뻐끔거렸다. 눈 앞의 남자도 제 자신이라면, 할복만큼 꺼림칙할만 한 게 없었을 터였다. 툭하면 할복이다 뭐다 난리치는 이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저였다. 그런 제가, 할복을 하려했다는 건 무언가 단단히 틀어진 일이 있었으리란 반증이었다.
대체 미래에선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닌 거야. 그래서 할복은 성공했나?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입술을 깨물며 의문들도 내리 눌렀다.
"...와 진짜? 굉장하구만. 내가 아는 긴토키 씨는 절대 할복할 사람이 아닌데."
"그러게나 말이다. 나도 5년 후의 내가 할복할 줄은 몰랐어. 엄청 놀랐다니까."
긴토키가 나름 키득거리며 소리를 냈다. 이윽고 긴토키가 원하던 장소에 도착했다. 자주 이 곳에서 지는 석양을 바라보거나 멀리 출장을 다녀온 녀석들이 어디쯤 오나 보곤 했다. 상념에 잠길 틈도 없이, 10년 전의 긴토키가 그를 제치고 나섰다. 가운데 쯤으로 가선 몇 번 발로 툭툭 바닥을 차더니 품 속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바닥에 깔았다. 무사라고 이런 마지막까지 격식을 차리는 게 어이가 없는 한 편, 당연히 그래 마땅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것도 안물어보는군."
"물어본다고 대답해줄 위인도 아닐테고, 어차피 죽을거 근심없이 죽으련다."
발칙하기까지한 반응에 긴토키는 실없는 미소만 흘렸다.
"그럼 잘 부탁한다 목베기."
언제 챙겼는지 검 한 자루를 건네주며, 아주 당연하게 부탁해오는 모습에 긴토키는 어떨떨한 표정으로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뒤늦게서야 어린 제 자신이 무엇을 부탁해왔는지 깨달은 긴토키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곁눈질하며 긴토키도 속으로 혀를 찼다. 이런 뭐같은 상황을 따지고 싶어도, 그 원인이 저인지라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기껏 여기까지 와준 제 자신에게, 자기 목까지 베어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면서도 참 잔인하단 생각이 들었다. 긴토키는 입고있던 진바오리를 벗어 제가 무릎 꿇을 자리에 놓았다. 무슨 느낌일까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과거로 넘어와, 과거의 자기를 마주하고 죽으라 말하는. 할복하는 자기를 바라보다가, 그 목을 베어주어야 하는 느낌은. 준비를 마친 긴토키는 마지막으로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먼저 가서 미안하다. 넌... 어떻게 되는 거지? 역시 할복인가, 목은 누가 베어 준다냐?"
긴토키는 어이가 없어서 허파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이상한 소리를 냈다. 아니 죽기 직전에 다른 녀석 죽는걸 걱정하는 멍청한 녀석이 어디있단 말인가. 아차. 긴토키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이 멍청이가 곧 나지. 긴토키는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구겨 웃었다.
"그런 쓸 데 없는 걱정은 필요없어. 걱정마. 난 지금 네 부속품 같은 존재라, 네가 죽으면, 따라서 사라진다고."
"거참 편리한 시스템이구만."
짧은 대화와 웃음소리가 끊기고 곧바로 무거운 정적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내 그것도 끊겼다. 긴토키는 무릎을 꿇어 자세를 잡았다.
"...사과는 안 하마."
긴토키가 조금 가라앉은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10년 전의 긴토키는 긴토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손수건 위에 놓아둔 칼을 잡아들었다.
"됐어. 필요없다. 따지자면 내가 시간의 흐름상 제일 이르니까, 내가 문제잖냐."
"흥, 잘 알고 있네. 네 놈이 부주의해서 그런 거다."
"젠장, 그 쪽이 나라지만 정말 열받게 만드는 구만."
긴토키는 눈을 감고 여러 명언들을 떠올렸다. 쇼요 뿐 아니라 가츠라에게서도, 옛 명장들에 관한 이야기라던가 옛 성인들의 명언들을 귀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것 같은데 막상 생각나는 게 없었다. 보통 죽기 직전에 이렇게 정신 수양하고 죽지 않나. 그런 상황에 맞지 않는 생각도 했다.
"젠장. 너무 길잖아..."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칼날을 제 복부로 향하게 잡았다. 할복하기에 용이한 단도가 아니라 하는 수 없이 칼자루가 아니라 칼날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날이 선 쪽에 닿는 피부가 투둑 거리며 베였다. 아직 할복도 안했는데 벌써부터 칼날에 피가 묻어있었다. 그걸 보며 긴토키는 참 엉망진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긴토키는 다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바로 옆에 죽음이 누워서 잠자리를 청하는 곳에서 지내왔건만, 막상 스스로가 그 잠자리로 기어들어 가려하자 겁이 났다. 조금씩 떨리는 손을 10년 후의 제가 보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싶었다. 아냐. 지금 중요한 건 그런게 아니야. 이제 곧 죽음을 눈 앞에 둔 인간들은 보통 뭘 하는가? 이야기로만 듣던 주마등 같은 것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젠장. 아무리 아무것도 없이 살았다지만, 그래도 살아온 인생이 몇 년인데 이렇게 쓸쓸히 가야하나?
그 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린시절을 떠올려봐."
제 속은 어찌 알았는지, 마치 도움을 주는 것처럼 목소리는 다정하기 그지 없었다. 긴토키는 터져나오려는 조소를 참으며 그의 말을 따랐다. 어린시절. 어린 시절이라. 최초의 기억은 시체가 즐비한 전쟁터였다. 생각해보면 지금 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마지막도 전쟁터에서 끝나게 된다니 찜찜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좋은 시절이 마냥 없었던 건 아니었다. 가츠라와 타카스기는 짜증나는 녀석들이었지만, 그래도 데리고 있어줄만 한 녀석들이었으니. 감기가 걸린 날에는 둘이 마을 시장에서 사탕을 사다주기도 했었다.
쇼요 제대로 사람의 생활을 할 수 있게 됐을 때도 조용하고 둘 만 하는 대련도 좋았지만, 함께 생활하는 식구나 넷으로 늘은 뒤는 더 즐거웠던 듯 싶었다. 비오는 날이면 나란히 마루에 앉아 빗방울이 연주하는 음악을 즐겼고, 날이 좋은 날이면 다른 서당아이들도 데리고 강가로 놀러 나갔다. 번갈아가는 대련도 재밌었다. 쇼요 이외에는 져본적 없던 자신에게 가츠라와 타카스기는 대등한 존재로 패배의 맛을 알려주었다. 싸우기도 참 잘 싸웠었다. 툭하면 네 머리가 마음에 안든다느니, 네 키가 마음에 안든다느니 싸웠고 그 후엔 사이좋게 꿀밤을 맞았다.
이런게 흔히들 말하는 행복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할 무렵에 그 행복이 아닐까 하던게 박살났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돌아올거라고, 되찾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고 제 옆에는 언제든 가츠라와 타카스기가 있었다. 타츠마라는 새로운 바보를 알게 된 것도 어찌보면 인연일지 몰랐다. 언제든 뒤를 돌아보면 거기 있는 녀석들. 그래서 언제든 앞을 보고, 그 사람을 향해 달려갈 수 있던 거였다.
아. 깜빡했다. 이 말을 안해줬잖아? 이런...
긴토키는 마지막으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귓속을 파고드는 소음이 커지는 걸 보니, 이제 시간이 얼마 없었다. 긴토키는 이를 꾹 물었다. 설령 미래의 자신으러 인해 이미 결과를 알아버렸다해도 멈추지 마라 요녀석들아. 마지막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의 약속. 그 여정에,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즈라, 타카스기.
다문 입 속으로 혀를 굴렸다. 정말, 미안하다.
단 숨에 두 팔이 접혔다.
참 깔끔하게도 찔렀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숨에 자기 목숨을 거는 이 멍청한 녀석이 어쩐지 안타깝다가도 부끄러웠다. 그런 멍청한 놈이 곧 자신이라는 걸 자꾸 깜빡했다.
그리고 참 깔끔하게도 베었다. 피가 묻어나오기는 했지만 용케 목이 떨어지지 않고 몸 위에 잘 붙어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사에몬에게서 혼씻기라도 베워두는 거였는데. 뒤늦은 후회를 하는 긴토키의 귀로 수 없이 부르짖는 제 이름이 들렸다. 바보 같은 녀석들. 너희한테 안좋은 추억을 심어주지 않으려는 이 배려를 발로 뻥 걷어차는 거냐. 하긴 그래야 그들 다웠다. 타츠마 네놈은 흔들리지 말고 네 이상을 펼쳐라. 즈라, 타카스기... 어린시절을 함께 해온, 같은 것을 보고 자랐던 그들은 형제와도 같았다. 수 많은 말들이 떠올맀지만, 그 어떤 것도 함부로 생각할 수 없었다.
긴토키는 자신이 사라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바로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상과는 조금 달랐다. 아니다. 이미 몸은 사라졌을 지도 몰랐다. 감각이 남아있지 않은 몸은 그가 실체하는 지도 의문이 들만큼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런가. 지금 남은 건 그저 영혼, 정신만이 남아있는 지도 몰랐다. 10년 전의 제가 죽고 그와 동시에 저 자신도 사라짐과 동시에, 무슨 이유에선지 의식만이 남아 단순히 제 존재가 사라진 이후를 보고있는 것일 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왜 굳이 이런 서비스 시간을 주는 걸까. 남아서 무엇을 확인라고 이런 자비를 주는 걸까. 긴토키는 분명 지금 얼굴이 남아있었다면 웃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들리는 소리가 의식을 흩어놓았다. 아까부터 간간히 들리던 제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걸 깨달았다. 저 멀리 바위 뒤에서 검은 머리가 보이자 긴토키는 눈을 감아버렸다.
바꿀 수 없다는 건 그저 다른 생각을 품지 않을까 하는, 혹시라도 도사리고 있을 위험을 아예 싹부터 잘라내기 위한 생각에서였다. 사실 긴토키가 바라는 건 그 스스로가 한 말과는 다른 것, 정반대의 것이었다. 오히려 바뀌길 바라는 것이었다. 그가 겪었던 시간들이, 그의 존재가 사라짐으로써 바뀔 수 있기를. 즈라. 타카스기. 내가 없다는 변수를, 그걸 통해 잃지 말기를.
"긴토키-!!"
비명과도 같은 외침 소리와 함께 긴토키는 의식의 끝자락을 놓았다.
난 할 만큼 다했다. 비록 상처를 준 녀석들이 있긴 하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더 중요한 미래를 위해. 너희들의,
우리들의 세계를 위해.
3.
어떻게 된 거지-?
한순간에 조용해진 주변소리에 긴토키는 눈을 떴다. 눈을 떴다? 감았던 눈꺼풀을 드는 감각이 느껴졌다. 어째서? 분명 의식만이 잔존해있던 것이, 제가 기억하는 스스로의 마지막이었다. 이제 그만 불순물은 사라져 주겠다는 생각으로, 완전한 소멸을 각오하고 의식을 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일까. 긴토키는 두 다리가 단단히 지각을 딪고 서있는 것이 느껴졌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제 머리칼 몇 가닥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전신에 돌고 있는 피가, 체온이. 두근두근 고동을 울리며 뛰고 있는 심장이 느껴졌다.
"...어째서?"
팔을 들어올려 손을 보았다. 보였다. 제 투박한 손바닥이. 이럴 수가. 분명 10년 전의 저를 죽임으로써, 저도 같이 사라졌어야 마땅한데...
머리를 스치는 의문에 긴토키는 고개를 돌렸다. 분명 바로 옆에, 할복하고 그대로 생을 마감한 10년 전의 제 자신의 시체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온데간데 없었다. 그러고보면 분명 의식을 끊기 직전까지 제 이름을 부르짖던 친구녀석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아. 조용했다. 말소리나 발소리는 커녕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서야 긴토키는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무 사이로 간간히 보이는 진지는 아까까지 그가 있던 곳과는 다르게 활기가 넘쳤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망연자실하게 서있는 긴토키의 뒤로 기척이 느껴졌다.
"뭐긴 뭐에요."
"없던 일이 된거다 해."
붉은 눈동자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놀라움을 품었다.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말투.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미래로부터의 전언이에요."
"긴쨩에게 미래를 돌려줄 거다 해!"
너희들이 어떻게... 말을 잇지 못하는 긴토키를 대신하기라도 하려는듯, 사다하루가 활기찬 목소리로 짖었다. 왕!
"너희, 대체, 어떻게..."
"어떻게긴, 네 녀석이 온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왔다."
반가움과 함께 분통함을 담은 얼굴로 가츠라가 등장했다. 긴토키는 익숙한 목소리에 몸을 돌려 그를 확인했다. 10년 전의 앳된 얼굴을 본 게 방금 전이었는데 이제는 그보다 15년 후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세월의 흐름을 느끼며 긴토키는 새삼, 이 곳과 저 자신 그리고 제 앞에 등장한 이들의 시간대가 전부 어긋나있다는 걸 깨달았다. 엉망진창이잖아... 흘러 말하는 걸 용케 들은 무리가 토를 달았다.
"그런말 하는 거 아닙니다 형씨. 애초에 형씨가 여기 온 것부터가 엉망진창이라구요."
"맞아. 시간대를 흐트린 것만으로도 우주적 범죄 급이거늘, 세계를 상대로 사기도 벌이려 하다니 도대체가 너란 녀석은... 이번엔 정말 봐주는 거고 뭐고 없다, 해결사."
"곤도 씨, 봐주고 말고 할 게 어딨어. 이 녀석 현재 이름 날리는 백야차잖아. 그것만으로도 잡아갈 명분이 흘러넘친다고."
가츠라의 뒤로 눈에 익은 얼굴들이 줄줄이 올라왔다. 긴토키는 놀란 얼굴을 감출 생각도 못한 채 시야에 들어오는 이들을 전부 담았다.
"긴토키 씨를 잡아간다니 그렇게는 못 해...! 긴토키 씨는 내가 잡아갈 거니까!!"
"어이 사루토비, 너 캐릭터 설정에 벗어난 말을 하고 있다."
"아니 잡아가도 된다. 멋대로 세계를 파괴하고 멋대로 복구시키고 사라지려 했으니, 죄목이 무거울만 하지."
"후후 큐짱도 참. 그래놓고 보석금 주고 석방시킬 거잖아?"
"아, 아냐! 난,"
"혼자서 긴토키 씨를 독차지해선 무슨 짓을 하려고!!"
"적어도 너보단 건전한 뭔가를 하겠지..."
너무 익숙한 시끌벅적함이어서 긴토키는 강한 이질감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본 게 병상 침대 위에서였던 타에는 생생하고 굳건하게 언월도를 들고 서 있었다. 삿쨩이야 원체 외양은 변하지 않았었으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있었던 그녀의 표정이 한껏 밝아져 있었고, 아깝게시리 왜 머리를 잘랐나 싶던 나머지 둘도, 결 좋은 머릿결을 자랑하며 원래 익숙하게 제가 알고 있던 모습이었다.
"대체......"
그들 뒤로 나무 사이사이로 보이는 수 많은 인원들이 모습을 감춘듯 서있었다. 백화의 단원들과, 큐베 가문의 수련생들, 가츠라의 양이지사들과 진선조 부대였다.
[긴토키 님의 부탁을 들어드린 것 뿐입니다.]
익숙한 기계음에 다시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사다하루의 뒤에서 타마가 걸어나왔다. 긴토키는 그녀가 여기 있다는 것보다 그녀가 옆구리에 끼고 있는 물건에 더욱 놀랐다. 시간도둑의 머리. 등잔 밑이 어둡다던가. 설마 시간도둑이 그녀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리고 그녀가 시간도둑임을 깨닫자 지금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전부 이해됐다.
"...타마, 너......"
15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 그녀가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했는지 잘은 몰라도 알 수 있었다. 대단한 기계였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 정도가 장난이 아니다.
[긴토키 님의 말을 전해드렸을 뿐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여기 계신 분들이, 긴토키 님을 보고싶다기에 조금 도와드린 것 밖에는 없습니다.]
이제는 농담까지 하는 그녀를 보며 긴토키는 어이기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말을 따르다면 조금 도와줬다는 그게 몰고온 건 긴토키에게는 엄청난 크기의 해일이나 다름없었다.
타마가 부드러운 미소를 표하며 긴토키에게 동야호와 필름을 내밀었다. 긴토키는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받아들었다. 필름을 다시 제 손에 쥐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사람이 무슨 마음을 먹고 여까지 왔는데 이렇게 뒷통수를 치다니. 긴토키는 동야호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이미 내 몸엔 엔미의 코어가 들어갔어. 이제와서 너희가 왔다한들 뭘, "
"문제없다 해."
말허리를 자르는 당찬 목소리에 긴토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이들은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걱정말아요. 원래 그 날 치뤄지려던 양이지사와 엔미 간의 전투는, 신원불명의 집단에 의해 기습을 받아 양쪽 다 약소한 피해를 입어서 며칠 미뤄졌어요."
"그리고 바로 오늘, 미뤘던 전투를 벌일 거다 해!"
과거의 제 자신에게 엔미의 코어가 들어갈 일을 아예 없애버리다니.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아이들을 보며 긴토키는 눈썹을 치떴다. 긴토키는 상황만 됐다면 바닥을 뒹굴며 폭소하고 싶었다. 신원불명의 집단? 아주 그냥 대놓고 내가 바로 안경거치대요- 하고 말해주지 그래. 아니 게다가, 심지어 엔미 쪽까지 피해를 입혔다고? 혹시나 잘못해서, 엔미의 코어가 다른 사람에게 들어갔으면 어쩌려고, 무모하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목엔 솜뭉치라도 넣어놓은 건지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긴토키는 어떨떨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머리 두 개 분은 차이나던 카구라는 어느새 제 가슴께에 와있었고, 신파치는 오히려 미묘하게 시선을 올려야했다. 긴토키는 새삼스레 5년 분의 시간 차를 느꼈다.
모습이 변했다라더라도 둘은 제가 알던 신파치와 카구라였다. 긴토키는 과거의 어느 일을 떠올렸다. 울먹이던 카구라에게 멱살도 잡혀보고 신파치에게 주먹으로 맞아 날아가기도 했었다.
당신이 우리를 지켜줄 테니까. 우리가 당신을 반드시 지킬 테니까.
참 무섭다 무서워. 자기가 한 말은 기필코 지킨다는 건가 싶었다. 어찌보면 그 때 신파치가 해줬던 말이 맞았다. 난 너희를 지키려 들었다. 그리고 너흰, 그런 나를 지키기 위해 여기까지 와버렸다.
참 듬직하게도 자랐다. 원래 제가 있던 세계의 신파치와 카구라가, 지금 눈 앞의 이 둘처럼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이렇게 잘 자라만 준다면 다시 한 번, 그 못난이들을 떠안고 가도 걱정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름을 품에 넣으며, 고개를 푹 숙이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거 원... 제대로 한방 먹었군."
긴토키의 목소리를 듣자 아이들은 긴토키를 지나쳐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향해 몸을 돌렸다.
"자요, "
"긴쨩!"
힘차게 말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긴토키도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 목숨이 걸린 싸움을 해야하는데 밝은 얼굴들을 돌아보며 긴토키는 혀를 찼다.
싱겁게 웃는 얼굴이 굉장히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너흰 진짜, 우주최고의 바보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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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먹은 건 아니지만 넣기 뭐한 마다오. 하세가와 씨는 양이시절 긴토키들의 참전을 막기 위해 고급청주를 들고 가서 술판을 벌이다가 잠들어서 늦었다고...
ㅇ
왜 좋은 원작을 냅두고 이렇ㄱㅔ 날조를 해서 고통을 받는가...
긴토키랑 백야차 시절 긴토키의 투샷이 보고 싶었을 뿐인데...
도저히 진빠져서 그만 탈고하자 원래 긴토키 생일에 올려주려던게...ㅋㅋㅋㅋ큐ㅜㅠㅜㅠ 8-8
사카모토에게 미안...ㅎㅎㅎ
긴토키는 사카모토를 즈라타카와는 다른 부류의 친우로 대하는 것 같다. 서당즈가 아니라는 차이에서 비롯한 거기도 하고 사카모토의 성정에서 비롯한 거기도 하고. 양이즈 사랑해ㅐㅐ
생각해보면 즈라가 얼마나 찌통이었을까...ㅠㅜㅠㅜㅠ즈라야 네가 마음고생이 심하다() 서당즈 사랑해ㅐㅐㅐ
해결사 사랑해애애애ㅐㅐㅐ